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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엿소리의 유래

고려시대 인생 70세면 고려장을 하였다고 지금도 구전되고 있으나 상여가 생긴 연대는 확실한 고증을 아는 분이 없다. 상여가 생기기 이전에는 지게 또는 들것에 시체를 운구하다가 외관상 약간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차츰차츰 발전되어 이것이 상여가 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당마을 상여(어우림) 소리는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바 이 상엿소리는 현재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어화로 어화로 이화넘자 어화로

상여 나갈 때 앞소리에 "어화로 어화로 이화넘자 어화로" 하며 후렴을 합창하는데, 어화로(御花路)라는후렴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하여 온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왕좌를 노린 형제간의 피를 흘리는 투쟁 끝에 이방원이 승리했다. 이가 바로 조선의 세 번째 임금으로 태종이다. 무력으로 왕좌를 차지하였지만 중국에서 좀처럼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 결국에는 사신을 보내게 된다. 세사람의 사신이 중국에 들어 가자 중국 황제는 사신을 죽이고 말았다. 중국은 대국인 관계로 사신을 처단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사신은 시신으로 돌아왔다. 태종은 자신을 대신해서 목숨을 잃은 사신에 대한 보답으로 장례나 극진하게 치러 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좋은 명당자리에 장례를 왕의 명에 의거 국상으로 치르게 했다.

상여가 생긴 동기

확실한 연대는 모르나 상여가 생기기 전 먼 옛날에는 시체를 지고 산천에 까지 이르렀는데 지게를 지고 먼산까지 도달하면 무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남들이 볼 때 아주 천하고 업신 여겨 졌다. 시체를 지게에 지고 가는 것을 보면 친한 이웃사람이나 동네사람들이 더럽다고 이를 피하려 하고 보기를 꺼려 하는 것은 지금도 현실이다.처음에는 시체를 들것(사다리 같은 종류)에 얹어 2~4 사람이 메고 운상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들것에 얹은 시체 위에 외관상 보기 좋게 약간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차츰 차츰 발전되어 상여가 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고성이당 상엿소리

죽음 중에 고종명(考終命) 죽음은 오복에 속한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이를 행복화하여 이 세상 에서 못다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혼령이나마 극락(천당) 세계로 인도하고, 아울러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만분의 일이라도 하고자 마지막 하직길에 상여(어우림)소리와 함께하여 슬픔과 눈물로 전송하는 상례의식 절차이다. 상여(어우림) 소리는 충효의 사상을 더더욱 상식화 극력화 하는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징
상엿소리는 상도꾼의 상엿소리와 앞소리(서소리), 여상주(곡만) 울음소리는 누구라도 들어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평생에 못다한 효도를 스스로 깨닫게 한다.특히 우리군의 고성 이당 상엿소리는 전통 고유의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상엿소리와 여상주 울음소리를 따라 상도꾼이상여를 메고 험준한 오솔길.논두렁.밭두렁.외나무다리 건너기 등 특이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150여년(추정)전에 제작된 전통 목상여는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오동 길쌈 일소리 이미지

오동 길쌈 일소리

농경시대에 의식주의 일환이었던 의상의 삼베 제조과정을 연마하여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온고한 마음으로 옛것을 지키고 보존하여 선인들이 남겨준 소중한 유산을 다음 세대에 양속을 깨닫게 해주는데 목적이 있다.

유래

부녀자들이 가정에서 베, 모시, 명주, 무명을 짜는 과정을 일컫는 말인데, 삼베길쌈, 모시길쌈, 명주길쌈, 무명길쌈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길쌈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무명길쌈은 고려 말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쌈은 함경도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국적으로 행해졌으며, 여기에서 만들어진 직물은 농가의 주요한 소득원이 되었고, 화폐의 대응가치로도 쓰여지기도 하였다. 직물이 화폐로 쓰여진 역사를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시대에도 화폐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길쌈은 자급자족으로 의류 충당뿐 아니라 경제적 유통을 위한 광범위한 구실도 담당하였다. 고성오동 길쌈은 마을시조 선조님께서 1658년에 입촌하셔서 자손이 흥성하여 달성서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100여 세대가 살고 있으며 농경시대에 가정 의복은 자급자족은 물론 생활비용도 일부를 담당하였으나,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하나의 전통 문화유산으로 옛조상들의 삼베제조 과정을 수호신같이 여기고 고성에서도 유일하게 계승 전승을 위하여 지키고 있는 마을이다.

단계
  • 1. 삼밭매기 소리

    삼을 갈고 싹이 움트면 잡품을 제거하기 위하여 김을 매면서 삼밭매기소리를 단창도하고, 합창도하고, 교환창으로도 하면서 민요로서 생활고로 주된 소재로서 소리를 하여왔다.
  • 2. 삼잎치기 소리

    삼이 다자라고 나면 삼을 베어서 삼잎을 삼칼로 치면서 단독창이나 경우에 따라서 두세 사람이 같이 합창한다.
  • 3. 심곶소리

    삼잎을 치고 나면 삼대를 쪄서(베어서) 삼곶에다 넣고 삶는다. 삼곶은 자갈삼곶과 개삼곶 두 종류가 있는데 전대로 갈수록 자갈 삼곶을 많이 이용했고 후대에 드럼통이나 가마솥으로 만든 개삼곶을 이용했다. 삼곶에 삼을 삶기 전에 대주는 삼곶에다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고사를 지내는데 이것은 삼을 잘 삶아 달라는 기원의 의식이다. 이때 여자들이나 부정된 사람은 삼곶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한다. 삼곶소리도 같이 한다.
  • 4. 삼째기소리

    삼껍질을 물에 담갔다가 짜서 가락에 감아쥐고 한 가닥씩 손톱으로 쪼개어 손가락을 넣어 훑어내려 짼다. 짼 삼을 뿌리 쪽이 위로 가게 왼손에 한줌 쥐고 벌려 도마에 올려놓고 삼톱으로 톱는다. 이 과정에서 베의 품질을 결정된다.
  • 5. 삼삼기 소리

    삶은 삼을 들어내어서 마르기전에 삼을 벗긴 후 삼의 질이 굵은 것은 굵게 째고 삼의 질이 좋은 것은 가늘게 째어서 곱은베 굵은베를 짜고 했다. 이웃에 모여서 삼을 삼기도 하고 가정에서 가족끼리 모여서 삼기도 하면서 삼삼기 소리를 단독창이나 합창으로도 하였다.
  • 6. 물레소리

    삼을 모두 삼고나면 삼은 삼을 채반에다 얹어 말린 다음, 작은 물레질을 하여 꾸리를 만든 후 다시 큰 물레(돌곶)에 올리는데, 큰 물레에 올린 것을 한접이라 하고 한접이 되면 빼내어서 말린다.큰 물레질을 하여 빼낸 여러 점의 삼을 모아서 탈색 및 다 벗겨지지 아니한 삼껍질을 벗겨내기 위하여 잿물(또는 양잿물이나 콩깍지 잿물)에 담구었다가 들어낸 후 이것을 따스한 방에 헌 옷가지나 이불 등을 덮어서 4일정도 익힌 다음 꺼내어서 찬물에 헹구어 다시 말린다. 이때 양잿물에 담그면 색상이 누런 빛깔이 나고 잿물에 담그면 색상이 재색이 나는데 잿물에 담근 삼이 실이 튼튼하고 질이 좋다.삼이 마르고 나면 이것을 다시 큰 물레에 끼어서 실을 풀어 내린다. 내린 실은 날을 고르면서 물레소리를 한다.
  • 7. 베 나르게 소리

    물레를 잣어서 돌곶에다 올린 후에 삼실에 잿물을 먹어서 이것을 익려 가지고는 다시 풀어 내려서 날을 고르게 되는데 얼 가닥으로 고르는 것이 보통이나 스무 가닥으로 고르기도 한다. 이렇게 날을 고르는 작업을 베나르기라고 한다. 베를 나르면서 베나르기소리를 한다.
  • 8. 베날기와 매기

    정해진 샛수에 실떡 10개에서 끝을 찾아 고무레의 10구멍을 통과시켜 무명과 같은 방법으로 날기를 한다. 매기도 무명과 같은데 다만 껍질째로 맷돌에 갈아 차차물에 쑨 풀을 사용하는 것이 다르다. 흡습제로 소금을 약간 풀어 넣는다.
  • 9. 베짜기

    베매기를 하여 감아올린 도루마리를 베틀에 선다리에 고정시키고, 한줄, 한줄 띄워서 잉앗대에 걸어 여러날의 줄을 잉앗대에 걸게 된다. 이것을 부테와 연결된 말코에 걸어 연결한 후 끌신을 발로 당기면 피스콘 작업을 하게 되고 그 사이를 씨줄 꾸러미를 담은 북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바디가 치게되어 베를 짜게 된다. 베짜기 소리는 서사 민요로서 단독창이며, 베틀구조와 베짜는 과정을 다른 사물이나 고사에 비유하여 부른 민요이다.
  • 10. 뒤풀이(사항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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